110여 기의 고인돌과 60여기의 선돌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 특히 용문면 상금곡리에 북방식 고인돌 1기가 있다.
삼국시대
신라의 최북단에 위치한 우리 고장은 신라 제19대 눌지왕(417~458) 때 ‘수주촌’이라는 이름이 [삼국사기]에 있다. 신라 제22대 지증왕 6년(505)에 ‘수주현’으로 되었다. 통일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영안(풍산), 안인(동로,산북 일부), 가유(산양), 은정(상리,하리)의 4현을 영속시켜 예천군이 되었다.
고려시대
태조 18년(936)에 보주로 개칭되고, 성종 2년(983)부터 양양이라는 별호가 생겼으며, 성종 14년 (995)에는 청하라는 별호도 생겼다.
현종 9년(1018)에 전국을 1경 5도 양계로 할 때 보주는 안동영지사부에 소속되었고, 이때 용주군은 용궁군으로 고쳐 상주목에 속하게 되었고, 감천현은 안동영지사부에 이속되었다.
명종 2년(1172)에 왕이 태자(후에 22대 강종)의 태실을 용문사 부근에 마련하고 보주를 기양이라고 고쳐 현령을 두었고 용궁군에는 감무를 두었다.
신종 7년(1204)에 기양현을 다시 보주로 고쳐 관원의 품계를 격상시켰다.
원종 15년(1274)에 임지한 장군이 반적 최사의 무리를 토평한 전공으로 상주목 관할의 다인현을 예천군의 속현으로 삼아 광무 10년(1906)까지 영속하였다.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에 보천군으로, 태종 16년(1416)에 또 예천군이라고 하여 옛이름을 되살렸다.
고종 31년(1894) 8도제 시행 당시 경상도 예천군이 되고 고종 33년(1896) 13도제 실시 때 경상북도 예천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