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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 : (1606 – 1681) 드높은 기개로 의리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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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7회 작성일 25-01-08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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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 : (1606 – 1681) 드높은 기개로 의리를 말하다. 


 

김주는 1606년(선조39) 예천군 용문면 구계리에서 의금부도사를 역임한 아버지 김극계金克繼와 어머니 평산平山 신씨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의성이고 자는 여정汝定, 호는 불구당不求堂이다.


1633년(인조11) 27살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3년 뒤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래李崍 등과 힘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나라는 불과 6일 만에 한양을 점령하고 남한산성으로 급하게 피신한 조선을 압박한다. 마침내 이듬해 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 남문으로 나와 삼전나루에서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갖추고 항복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주는 울음을 삼키고 말머리를 돌린다.


1638년 명을 함락시킨다는 명분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병사를 보낼 것을 요청한다.


김주는 청나라 군대파견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할 것을 주장하는 긴 상소문을 올려 온 나라를 놀라게 한다. 당시 청나라 주장을 반대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이때 이미 명나라는 지방 주와 군이 거의 다 청나라에게 함락되어 있었다.


조선은 병자호란으로 피폐한 때였지만 청이 병사를 요구하자 온 조정이 공포에 떨어 숨죽이며 한 사람도 저항하며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없었다. 김주 만이 자신을 돌보지 않고 선비를 이끌고 윤리와 의리를 밝힐 것을 주청하였다. 비록 채택되지 않았지만 사림의 기운을 천하에 북돋우고 기개를 떨쳤다.


김주는 자신의 녹봉을 쪼개서 흉년에 대비해 저축했다가 봄에 나누어 주고 가을에 거둬들였다. 역에서 도망간 자들이 돌아오니, 뒷날 백성들이 돌에 새겨 김주를 추모했다.


1648년 병조를 거쳐 무장현감으로 나갔다. 무장현은 병란 뒤인지라 관청이 없었다. 김주는 먼저 객관을 창건하고 관아를 정비했다.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인자함과 은혜로움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관속들을 너그럽게 부렸다. 엄정하게 서로 도우니 고을 아전들과 향리들이 함부로 설치지 못하고 백성은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모든 폐단은 바로 잡혔고 선정을 펼쳐 지방에 제일가는 수령이 되었다.